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후 처리 == 1960년 6월,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에 유족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.[* 대구·경북 지역의 경우 1960년 [[4.19 혁명]] 직후 유족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.] 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, 1961년 [[5.16 군사반란|5·16 쿠데타]]로 집권한 [[박정희]] 정권은 유족회를 ''''반국가단체'로 규정하고 강제 해산시켰고'''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 받았으며, 위령탑은 쇠망치로 부서졌다. [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0724599|출처]], [[http://news.mt.co.kr/mtview.php?no=2013051006018236509|출처 2]]. ||[[파일:external/www.newscham.net/3.jpg|width=100%]]||[[파일:kyoengsan_bones.jpg|width=100%]]|| 이렇게 [[학살]]이 10년도 채 안 되어 다시 잊히고, 갱도 중 제2수평굴 입구는 새마을운동 당시 농업용수를 위해 [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2571138|콘크리트 수중보]]로 만들어 막아놓는 등 [[폐광|폐쇄된 상태]]로 있었으나, 남은 제1수평굴 입구는 [[해골|뼈]]가 나오는 [[동굴]]이라 하여 주변 대학교 학생들은 그곳이 어떠한 장소인지도 모른 채 [[담력훈련|공포 체험]]을 위한 용도로 쓰는 등 문제가 심각하였다. 적어도 [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2661592|2002년]]까지만 하더라도 제1수평굴 입구 기준 갱도 입구가 큰 안전장치 없이 [[https://entertain.naver.com/read?oid=215&aid=0000177068|노출]]되었기 때문이다. 2005년 기준으로 제1수평굴 입구는 철문으로 굳게 막아놨고, 앞에 학살지라고 안내판도 붙어 있다. [[https://blog.naver.com/iwillbes27/221791731971|싸이월드 사진]]. 하지만 [[https://entertain.naver.com/read?oid=215&aid=0000177068|무속인]]이나 [[폐허 덕후]],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지 주변에 양초, 과자봉지, 술병, 담배 꽁초, 콘돔 등의 [[https://blog.naver.com/bwkwon7/220886602324|쓰레기]]와 과거 유해 발굴했을 때 사용하던 도구들이 돌아다니고 발굴 현장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며, 컨테이너 안에는 유해가 계속 보관되어 있다. [[https://www.ilyosisa.co.kr/news/article.html?no=144658|기사]]. 또한 CCTV를 달아놓은 제2수평굴 입구와는 달리 제1수평굴 입구는 사유지라 관리될 법도 하지만, 해가 떠 있을 때에는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경비원이 제재를 하더라도 밤에는 감시가 안 되어서 그런지 인근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을 타고 찾아와 잠금장치를 파손한 후 갱도 내로 들어가는 등 [[https://www.idaegu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277606|소란]]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. [[폐허 덕후|폐허 매니아]]가 가서 찍은 영상이 [[https://www.youtube.com/results?search_query=%EA%B2%BD%EC%82%B0+%EC%95%88%EA%B2%BD%EA%B3%B5%EC%9E%A5|유튜브]]에 검색하면 꽤 나오고, 이 중 2개는 후술할 [[제보자들]]에서도 나왔다.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Ej3d9xv2SHU|영상]]. 2000년 3월 [[경산시|경산]]유족회가 [[https://blog.naver.com/bang9163/222045751548|재결성]](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aver?mode=LSD&mid=sec&sid1=102&oid=088&aid=0000188150|기사 1]], [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2571138|기사 2]])되어 위령제를 다시 지내기 시작[* [[http://www.ksinews.co.kr/mobile/view.asp?intNum=2333|2007년 제1수평굴 입구 앞]].]했다. 2001년 2월 경 [[MBC]] [[이제는 말할 수 있다]]에서 [[보도연맹]]과 관련된 취재 중 이곳을 발견해 민간 차원의 [[해골|유해발굴]]을 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aver?mode=LSD&mid=sec&sid1=103&oid=009&aid=0000446625|제안]]해서 준비 후 동년 3월 9일부터 발굴을 시작했고, 6시간 만에 퇴적물을 치우고 제1수직굴에서 70m 아래에 있는 제2수평굴 입구를 발견했지만 콘크리트 옹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. 다음 날인 3월 10일에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정한 뒤 3월 11일 오후 2시 45분에 콘크리트로 막아놓은 제2수평굴 입구를 [[https://news.naver.com/main/read.naver?mode=LSD&mid=sec&sid1=102&oid=047&aid=0000009626|폭파]]해 개방했다. 2005년 5월 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해 동년(2005년) 12월 1일 [[진실·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]]가 설치되고, 2007년부터 정부 주도로 [[http://www.dginews.co.kr/ArticleView.asp?intNum=4003&ASection=001003|유해 발굴이 시작되었다]]. 2009년 11월 17일 과거사위원회는 경산 [[코발트]]광산 [[학살]] 사건은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고 판정했다.[*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결정서에 따르면 "[[대한민국 육군본부|육군본부]] 정보국 CIC와 [[경찰]], [[대한민국 국군 군사경찰|헌병]], 해군정보참모실,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[[대한청년단|우익청년단원]]에 의해 소집, 연행, 구금된 후 집단[[학살]] 되었다"고 밝히고 있다. [[https://entertain.naver.com/read?oid=215&aid=0000177068|기사]].] 하지만 예상되는 [[해골|유골]]의 절반 가량도 채 수습되기 전에 정권이 바뀐 이후 2010년 진실·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[[http://www.slist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71921|해산]]되면서 수습 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많은 유골이 이곳에 남아있고, 수습된 [[해골|유해]]는 유족회가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되었다. [[http://news.mt.co.kr/mtview.php?no=2013051006018236509|기사]]. 2008년 무렵 [[인터불고]] 경산컨트리클럽 진입로를 개설하고 안경[[공장]] 건물을 파티마요양병원으로 [[리모델링]]하면서 상당량의 [[해골|유해]]가 [[https://www.ilyosisa.co.kr/news/article.html?no=144658|소실]]된 것으로 추정된다. 그나마 수습된 [[유해|유골]]들도 정부 계약에 따라 특정 대학[* 경북에 있는 대학은 아니다. 해당 타지역의 [[보도연맹]]원도 이곳에 끌려왔다. [[영남대학교]] 문화인류학과의 한 교수가 그 대학의 교수와 함께 [[https://www.hani.co.kr/arti/society/society_general/626314.html|공동발굴팀]]을 이끌었다.]의 박물관을 거쳐 2019년 세종시 [[http://www.idaegu.com/newsView/idg201906260050|추모의집]]에 [[http://www.seniormaeil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8977|임시 안치]]된 상태이나, 당시 대학은 유골이 있다는 이유로 괜히 혐오 시설이 될까 봐 자신들의 학교 이름을 절대로 노출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등 이 [[보도연맹]] 문제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또 잊혀져 일종의 [[폐건물|흉가]] 체험 장소가 되어버린 비극을 보여주었다. 컨테이너와 [[https://ethnoscopes.blogspot.com/2015/10/gyeongsan-cobalt-mine-civilian-massacre.html|뼈 한 상자]]는 2014년~[[https://ethnoscopes.blogspot.com/2015/10/gyeongsan-cobalt-mine-civilian-massacre.html|2015년]] [[광주비엔날레]] 전시관 광장에 전시된 적이 있다. 모르고 보면 전혀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었다. 또한 전시실에는 과거사위원회 [[https://www.gwangjubiennale.org/gb/Board/8249/detailView.do|조사 당시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촬영한 영상]]을 상영했다. Navigation ID 참조. [[2016년]] 11월 유족회가 제2수평굴 근처에 비를 세웠으며, [[https://www.anewsa.com/detail.php?number=1096095&thread=09r02|위령탑]]과 주변 시설이 정비되었다. 이후 제1수평굴 근처에서 지내던 위령제를 제2수평굴 근처 위령탑에서 지내게 되었다. 입구는 철문으로 폐쇄하고 CCTV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